조선 12대 왕 명종 너무 약했던 왕권
재위기간 : 1545년 ~ 1567년 (약 23년)
33세에 승하
선왕 ( 인종 ) - 명종 - 후왕 ( 선조 )
명종은 인종의 이복형에 속한다. 하지만 인종이 고작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게 되자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이 때 명종을 왕이 되게끔 만든 사람은 문정왕후이며 이후 자신은 왕과 비등한 권력 속에서 명종보다 오래 살게 된다. 후에 문정왕후를 계기로 붕당(현재 한국의 정당 비슷한 개념)이 생기게 된다.
명종이 왕을 잡았던 시기에 당시 조선의 재정 상태나 왕권 모두 좋지 않아서 사실 상 그렇다할 업적을 남기지 못한 왕이다. 실제로 사람들한테 명종을 물어보면 대부분이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연산군때 폭군같은 정치를 하며 중종 또한 조광조를 내세웠지만 조광조가 죽고 난 후에 그렇다할 업적을세우지 못했기에 명종또한 신하들의 눈치를 상당히 많이 봐야하는 상황이었다.
을사사화
당시 선왕인 인종을 따르던 대윤파와 문정왕후를 따르던 소윤파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인종이 왕위에 겨우 8개월 정도 있다가 승하하게 되면서 명종이 왕이 되고 문정왕후에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다 싶어 문정왕후와 소윤파의 대장 꼴인 윤원형은 당시 권력이 막강했던 예조판서로 임명된 직후 소윤파 무리들을 대거 귀양보내버렸다. (이전의 사화 치고는 소소한 편..이라고 해야하나)
정미사화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 명종2년 , 붉은 글씨로 대윤파의 폐단을 적어 놓은 것이 양재역 근처에 벽서가 새겨졋다. 익명으로 적은 이 글자는 양재역 벽서 사건이라 불리는데 이것이 큰 파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윤원형은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며 의심가는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 옥사 시켜 버렸다. 이에 소윤파는 거의 흐지부지 되었고 당시 퇴계 이황의 가문또한 연류되어 형이 귀양을 당하고 이황도 파직당하게 된다.
명종의 업적
- 경복궁 복원(당시 공사하다가 불에 탔다)
- 비변사 국가 안보의 상설기구로 추진(을묘왜변이 그 계기)
- 왜군 방지를 위해 판옥선 제작 및 총통 개량, 수군 군사력 강화
- <구황찰요> 제작 (기근을 구제하기 위한 용도)
- <경국대전주해> 간행 (경국대전의 어려운 용어를 풀이한 책)
위의 판옥선은 조선의 수군이 활용하던 최신형 배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총통이란 화약을 이용해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는 형식인데 명종 시대 때 이를 개량해 쓰면서 전투력을 증대시켰다.
재위기간이 그렇게 길진 않았으나 어린 시절부터 왕을 했으며 다른 왕들과 비교할 때에도 그렇게 짧은 편이 아니었으나 그렇다할 업적을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임금의 제사를 지내는 종묘의 정전에 포함되지 않을 정도인데 이는 명종이 당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쫓겨난 왕이나 재위기간이 짧은 왕 아니면 거의 다 받았는데 말이다.
다만 명종시대 때 이루어볼만 한 큰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임걱정의 난이다.
임꺽정의 등장
우리에게 내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서 임꺽정만큼 잘 알려진 사람도 없다. 거의 홍길동과 맞먹을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의 남자 다운 외모와 덩치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의적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조선에는 3대 도적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이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책으로 나오기 까지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산 것으로 보아 도적으로 활동하면서 썩은 나라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는 취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충분했을 것이다.
임꺽정이 살던 당시 명종 시대는 왕권이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궁궐 밖은 그야말로 부정부패가 심화된 탓에 민심은 그야말로 바닥이었던 상황
가뜩이나 연산군 때는 왕조차도 폭군이어서 어려웠는데 이후 왕들도 그렇다할 업적을 세우지 못하니 민심은 계속해서 안좋아지고 있다.
물론 기록에 따르면 임꺽정이 의적이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현대에 각색된 사실일 뿐이다. 또한 홍길동 또한 현대에 와서 미화된 부분이 많은데 홍길동은 자신을 만난 백성이 있으면 족족 죽였다고 한다..
어쨌든 후대에 와서 각색된 부분이 많지만 임꺽정이 세력을 키우고 계속해서 대담하게 행동하자 명종이 관군을 풀어 임꺽정을 추적하였고 임꺽정을 1년간 추적한 끝에 찾아내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임꺽정이 이렇게 의적으로 현대에 와서 불리게 된 것은 당시 임꺽정이 의적의 행태는 아니었으나 임꺽정에 의해 부정부패가 만연한 탐관오리들이 박살나는 과정은 당시 백성들에게는 통쾌했을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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