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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실체 민비의 잘못된 역사 인식 사치

SUN 2021. 12. 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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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아내이자 순종의 어머니, 명성황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명성황후 

 

그는 고종의 아내이자 순종의 어머니 입니다. 그녀는 고종의 아내로 외척 가문의 힘을 상당히 많이 쓴 왕후이기도 한데요. 뮤지컬 명성황후가 대히트를 치면서 우리에게는 일본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된 조선의 마지막 국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 의식, 공과 실을 바로잡기

물론 우리나라의 국모가 일본에게 시해당한 것은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자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명성황후가 조선의 국모로 받들여질 만큼 과연 조선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우리는 그 사실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명성황후의 먼저 잘못된 면부터 보도록 합시다. 

1. 외척과 세도정치 그리고 폭정

서양 나라들이 지하철을 세우고 다른 나라를 침략해 막대한 부를 거뭐지고 있었습니다.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고 과학을 연구할 때 과연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조선은 그렇게 발전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이 교역을 끊고 독자적인 행태를 부리며 우리 또한 과학은 커녕 시장조차 발달되지 않은 나라가 조선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려가고 계속되는 폭정에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외척을 통한 세도정치의 부정부패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그런 세도정치를 타파시키기 위해 풍양 조씨,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자 이전과 다른 민씨를 왕후로 세워서 외척을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결국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는 정권에서 점차 물러나게 되지만 오히려 민씨 가문 일가가 권력을 독점하고 국고를 탕진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습니다.

 

<관직을 돈을 주고 산다. 그 관직을 돈을 준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산 사람에게 이전 사람을 내쫓고 더 많이 돈을 준 사람을 앉힌다. 사람들은 관직에 있을 때 자신이 쓴 돈을 메꾸기 위해 더 많은 농민을 수탈하고 포악한 탐관오리가 된다.>

 

쌀에 온갖 잡다한 돌을 섞어서 준 군인들

그에 임오군란이 터지게 되고 민씨 가문의 민겸호 피살 및 전 영의정 이최응 과 민창식 살해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과 관료들의 횡포,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었다. 군인들은 명성황후를 죽이려 했으나 민비는 자신의 동생의 집에 피신을 해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때 군인들은 여흥 민씨의 세력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했다. 

 

이 중심에는 민비가 있었고 군인들은 민비가 쫓아낸 흥선대원군에게 입궐을 요청하게 되고 잠시동안 섭정을 하게 되지만  민씨는 청나라에 군대를 파병을 요청하고 흥선대원군은 청의 세력을 못이겨 유배를 떠나게 된다.

출처/ 역사저널 그날

2. 국고의 씨를 말리는 사치

- 한 사례가 있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갑신정변 때 크게 다쳤다. 그 때 외국인 의사 알렌이 그를 치료해 주었다. 

 

여기서 민비는 크게 알렌을 대우해줬는데 그 금액이 과연 돈으로 얼마인가?

10만냥을 건넸는데 이 돈은 현재의 50억의 가치고 국가의 예산의 2%의 돈이다. 한 국가의 2%에 해당하는 돈을 자신의 조카를 치료해주었다는 돈으로 내놓는 왕후 과연 이 왕후의 씀씀이는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처사였을까?

 

-또한 국고의 10%를 무당과 굿에 썼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민비는 무당과 굿을 그토록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국고의 10%에 해당하는 돈을 무당과 굿을 하는데 썼고 이런 씀씀이는 나라를 탕진하게 만들고 발전을 못하게 방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정치에 자신의 인척을 끌어들이고, 순종이 태어날 때 잔치를 허구하게 벌여 예산을 까먹었다.

동학 농민운동의 대처 / 한반도를 점점 어둠으로

 

두장군 정봉준을 중심으로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 상 전주성이 함락되고 국가는 진정시키고자 안찰사를 보내 이들을 진정시켰으나 그들을 죄인 취급하는 관리로 인해 또 다시 일어나 농민들이 한양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조선이 얼마나 군사체계가 개판이었는지 들어나게 된다. 훈련이 안된 농민한테도 지는 관군들 과연 조선은 강한 나라였을까? 이런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명성황후와 고종은 청나라 군대를 투입하게 된다. 하지만 톈진조약에 의거 일본 또한 조선에 들어오게 되고 봉기가 차츰 시들어지게 되면서 청나라는 떠났으나 일본은 계속 경복궁에 주둔한다. 결국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조선은 일본의 손안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일본이 내정 간섭을 하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동학 농민군은 이겨낼 수 없었고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에게 동학 농민 15만명은 끔찍하게 살해되게 된다. 

조선의 관군들과 일본이 합쳐서 농민들을 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런 조선의 정부의 행태를 이해할 수나 있을까? 과연 이 시대의 90%인 조선의 농민으로 태어난 당신이라면 과연 명성황후의 일본에게 시해된 죽음을 고결한 죽음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이 동학농민 운동은 민중들이 일어난 반란이다. 조선의 행포에 못이긴 반란에 군사로 진압이 안되자 청의 손을 빌려 농민들의 외침을 짓밟아 버린 사건이다. 과연 이런 나라에 충성을 할 수 있겠는가?

 

민비는 이후 일본에 의해 시해를 당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의 민비가 살해당한 것은 물론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전 임오군란 때도 민비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일본군이 아닌 조선의 군인들에게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지나친 사치와 세도정치는 나라를 좀먹게 하고 발전을 막았다. 그리고 민씨 일가의 탐욕스러운 자리 다툼은 공정을 앗아갔고 농민들의 삶의 의지를 비틀었을 것이다. 돈이 없으면 관직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그 관직도 더 많은 돈을 갖다바친 자에게 넘어갔다. 일본에 의해 망하기 전에 조선시대 때의 민비의 폐악은 나라를 극단으로 식민지가 되게 한 것에 일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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