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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된 왕 연산군 업적 및 무오사화 갑자사화

SUN 2021. 12. 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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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 10대 국왕 연산군 

재위기간 : 1494년 ~ 1406년 약 13년 

연산군(燕山君) 한자의 뜻도 의미있는게 제비연이지만 당시 놀 연 으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기를 좋아하는 것이 가만히 있는 산에 비할 바 없다. 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군이었던 성종의 아들로 태어난 연산군은 조선시대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기준점을 가지고 있는 왕입이다. 사실 세조 떄 최고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신하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조선의 국력은 쇠약해졌습니다.

 

연산군 때 드디어 왕을 폐위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가뜩이나 사림파 훈구파로 나눠진 신하들이 싸우고 있던 와중 왕이 폐위되니 이때부터 왕권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연산군의 변화

연산군하면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폭군입니다. 

조선에서 반정으로 폐위당한 연산군과 광해군 하지만 둘은 너무나도 비교되는 차이를 보이는데요.

 

광해군의 폐위는 병자호란을 야기하고 명분또한 어거지로 끼운 것처럼 보이는 반면 연산군은 오죽하면 신하가 들고 일어났을까?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의외로 집권 초기에는 경연을 중요시하고 민생 안정에 힘을 쓰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하지만 세조 이후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던 왕권으로 신하들은 왕에게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하며 자극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아버지인 성종은 워낙 성군이어서 그런 것을 다 이해했지만 연산군은 성격이 글러먹은 탓에 참지 못하고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후에 갑자사화를 또다시 일으키면서 폭군이 되어 버립니다. 

연산군 업적

  • 역대 임금의 모범 사례를 기록해 놓은<국조보감> 완성
  • 사창,상평창,진제창을 설치해 백성의 어려움 구제 
  • <여지승람><국조보감>완성 
  • 젊은 문신이 임금의 명으로 직무를 쉬며 글과 독서를 하는 사가독서 부활 

이것들은 거의 집권 초기에 한 업적들이고 후기에는 계속 연회를 열며 유흥을 즐긴 왕입니다. 이렇듯 그래도 성종의 밑에서 배운 것이 있을 텐데 잘해보고자 하던 연산군이 갑자기 폭군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의제문과 무오사화

훈구 vs 사림 갈리게 된 배경

-먼저 훈구파는 조선 세조와 같이 난에 성공한 신하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세조 이후에도 영향력이 쎘으며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성종은 이들의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사림이 많이 있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이에 균형이 조금씩 맞춰가는 듯 했으나.. 

 

무오사화 발생

연산군은 이런 삼사가 임금의 말을 반대만 하는 작당들이라 생각했는지 사림들을 한 번에 잡아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 배경은 바로 조의제문

 

사림들이 따르던 자였고 세조 때 관리를 한 김종직은 사림의 뿌리와 다름 없었습니다. 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은 항우가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듯 세조를 비유하여 비판한 것입니다. 이에 김종직은 부관참시 시키고 사관 김일손 및 사림파 일부를 처형하면서 삼사의 입지가 매우 줄어들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림이 삼사의 역할이 커지며 너무 설친 면도 있어서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고 왕을 폐위하자는 목소리는 없었다.  

폐비 윤씨 사건을 알게 된 연산군의 갑자사화 

계비 윤씨가 폐위된 이유

연산군의 어머니인 계비 윤씨는 항상 비상(독약)을 숨겨놓는 행위를 하였다. 또한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는 일이 발생하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격노하여 윤씨를 폐위시키게 된다.

 

하지만 세자인 연산군을 아들로 두고 있는 윤씨에게 그 세력에 힘입고자 점차 동정론이 생겼으며 이를 지켜 보던 신하들과 왕은 결국 사약을 내렸다. 연산군은 어린 시절이어서 이를 모르고 살았었다. 

 

갑자사화

연산군의  패륜 

연산군은 성종의 묘비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고 폐비 윤씨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나 성종에게 잘못을 하여 사사되었다는 점만 알고 무덤을 잘 정돈해 주었다고 한다.

 

사실 자신의 아버지이자 선왕에게 잘못을 지어서 사사되었다고 말했으니 더 이상 어찌할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는 지아비의 영향은 컸다.

 

하지만 갑자기 폭주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욕한 귀인 정씨,엄씨를 고문하고 귀인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 봉안군을 데리고 와서 귀인들의 정체를 숨긴 채 매질을 시켰다고 한다.

(해당 내용이 얼마나 미친짓이냐면 귀인 정,엄씨는 성종의 후궁 즉 아버지의 아내인 것이다. 안양군과 봉안군은 자신의 이복동생) > 이후 귀인 정,엄씨 병사를 지켜 죽이고 안양군, 봉안군 역시 사약을 내렸다. 

 

또한 인수대비(성종의 어머니/사실상 건드릴 수 없는 위치) 에게 가서 자신의 이복 동생의 머리끄댕이를 양 손에 쥔 채 대비에게 술판을 벌였다고 한다. 또한 "대비는 왜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얼마 안 있어 이런 일 때문인지 인수대비는 화병으로 사망

 

신하 숙청 

폐비 윤씨 사건을 안 연산군은 본격적으로 연산10년에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그 당시 성종에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권했던 신하들 (사림) 뿐만 아니라 한명회,정창손 등 세조 때 공신이었던 훈구 세력도 부관참시 해버리며 사림, 훈구 세력 가리지 않고 숙청시켜버렸다. 

 

예조판서 이세좌(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사람)가 술을 흘렸다는 이유로 유배 이후 복직하지만 얼마 안 있어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기점으로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 세조 때 공신들도 다 부관참시를 당하고 폐비에 동의한 윤필상 또한 자살을 명받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폐비 윤씨 때 폐위를 찬성했던 자들은 거의 모조리 죽였다.

 

또 갑자기 무오사화때 목숨을 구제했던 사림들도 갑자기 죽이라 해서 희생을 당할 뿐만 아니라 훈구 세력들 또한 세조 때부터 이어져오던 권력을 뒤안길에 둔 채 8촌을 싸그리 말살당하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

(권력다툼하는 신하들을 다 죽인 채 자신이 절대권력을 이뤄낸 샘) 

 

중종반정

이후 신하들의 숙청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대로는 신하가 남아나지 않겠다고 느낀 훈구파와 사림파가 힘을 합쳐 연산군을 몰아내게 된다.

 

당시 민심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무관인 유자광, 박원종 등 손쉽게 반정에 성공하고 연산군의 동생인 중종을 왕위에 세우게 된다.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 그는 폐위된 후 유배에 보내지게 되고 몇달 있지 않아 폐위되게 된다. 

 

중종이 등용한 조광조 기묘사화 개혁의 최후

폐위된 왕 연산군 업적 및 무오사화 갑자사화 조선시대 제 10대 국왕 연산군 재위기간 : 1494년 ~ 1406년 약 13년 연산군(燕山君) 한자의 뜻도 의미있는게 제비연이지만 당시 놀 연 으로 쓰였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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