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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등용한 조광조 기묘사화 개혁의 최후

SUN 2021. 12. 1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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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된 왕 연산군 업적 및 무오사화 갑자사화

조선시대 제 10대 국왕 연산군 재위기간 : 1494년 ~ 1406년 약 13년 연산군(燕山君) 한자의 뜻도 의미있는게 제비연이지만 당시 놀 연 으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기를 좋아하는 것이 가만히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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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

재위기간 : 1506년 ~ 1544년 (약 39년)
조선 제 11대 왕

중종은 성종의 적차남, 연산군의 이복동생 이다.
조선의 왕위는 선왕의 적장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정통성이지만 연산군이 폐위되고 그 아들 또한 폐세자가 되었다.

따라서 신하들의 추대로 중종이 왕이 되지만 신하들이 세운 왕이기에 왕권이 강할리가 없었다.

세조 때 반란을 도운 공신들이 대거 자리를 유지한 사례가 있지만 세조는 자신이 지휘해서 왕위에 올랐던 것에 반면 중종은 어부지리로 왕이 된 만큼 반정 공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 같은 사림을 등용하지만 이마저도 마찰이 생기며 또 다시 사화가 벌어지게 되었고 반정 공신들이 세력을 잡았다.

결국 큰 업적을 세우지 못한 채 왕권이 상당히 약해지며 이에 따라 조선의 국력또한 내려가게 된다.

조광조 등용

중종 반정의 공신들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신진 사림이었던 조광조를 등용하게 된다.

중종 자신은 정통성이 부족한 왕이다보니 역모 사건이 끊이질 않으며 신하들에 세력이 너무 강력해 이를 제지할 필요가 있었다.

조광조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사림에게 이득이 되는 개혁을 시작했다.

성리학 이론으로 가득차 있던 조광조였기에 사림의 적극적인 등용을 하면서 사화로 죽창났던 사림의 세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조광조의 개혁정치

  • 현량과 실시 - 경전을 포함하지 않는 과거제도에 경전을 포함시켜 인재 등용 과거에는 시와 문학만으로 등용
  • 사림의 정통성 회복 - 대표적으로 정몽주는 조선의 개국을 막았다는 점에서 업적을 치지 않았으나 신원 회복 자신의 정통성 이음
  • 향약 보급 - 향약이라는 단체를 전국에 보급하여 성리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 소격서 폐지 - 성리학과 대립되는 도교의 사상이었으며 국가의 제사를 지내는 곳. 당시 큰 의미는 없었지만 훈구파의 반대에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사림의 힘을 과시하는 용도
  • 위훈 삭제 - 공신 중 공이 없으면서 이익을 챙긴 무리 위훈 삭제 주장

어찌보면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성리학의 나라를 만들자 즉 사림의 나라를 만들자는 의미가 큰지라 아직도 의견이 나뉘는 개혁들이었다.

실제로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죽게 되지만 이후 조선은 사림의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광조의 역할은 사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축에 낀다.

당연히 사림파와 반대되는 훈구파의 입장에서 왕보다 더 돋보이며 개혁 정치를 펼치며 자신 사림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조광조는 못마땅하게 보였을 것이다.

결국 나뭇잎에 조씨가 왕이 될 것이다. 라는 문구를 남기는 한자를 꿀로 써 애벌레가 갉아 먹게 한 다음 중종한테 보여주다고 한다.

당시 중종 또한 조광조의 권력이 커지는 것이 두려워서 인지 또 다시 3번 째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기묘사화

결국 중종 14년 대부분의 사림들이 처형되거나 귀양, 혹은 파직 당하면서 또 다시 한 번의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자는 조광조, 김식 등이며 이 원인은 바로 나뭇잎에 써져있던 '주초위왕' 이었다.

하지만 이 내용은 기록에는 전해지지 않는 현재는 야사로 통하는 내용이다.

당시 상황을 볼 때 훈구파의 입김이 어느정도 들어가기는 했겠지만 결정적인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훈구파의 위훈을 삭제하거나 성리학적 이념으로 나라를 개혁하려던 조광조는 훈구파와 극도의 대립을 가지게 되었다.

훈구파는 벌레에게 꿀로 주초위왕의 글을 쓴 나뭇잎을 줘 갉아먹게 한 다음 왕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해당 '주초위왕'의 뜻은 주초(走+肖) = 조(趙) 가 되는 점을 이용하여 조위왕이라는 뜻으로 조씨를 가진 자가 왕이 된다 라는 뜻을 가진 문장이다.

하지만 실록에 나와 있는 바로는 중종종이 스스로 조광조를 사사했다는 점만 나와 있으며 지금까지 왜 훈구파가 앞장서서 한 것처럼 나와 있는지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 사림에게 추양받았던 조광조를 중종이 죽였다고 적어놓으면 중종에게도 오점으로 남을 수 있으며(중종 이후부터는 사림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왕의 정통성에도 작은 문제가 될 수 있기에 훈구파가 그랬다. 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기묘사화의 이유

그럼 중종은 왜 조광조와 그 사림 일당들을 숙청한 것일까?

그 이유는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실록에서 조광조는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을 많이 보였다는 점이다.

특히 소격서를 폐지하면서 "세종,성종이 대성(어진 성군)이라 할지라도 소격서를 폐지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라고 말하는 등 연산군 때였으면 바로 숙청하게 될 만한 발언을 하는 등 위태위태 하기는 했었다.

또한 조광조의 개혁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훈구파에게 계속해서 박치는 행동이었기에 왕의 입장에서 불안해 보였을 것이다.

이게 쌓이고 쌓여 처음에는 조광조를 막 밀어줬음에도 계속해서 자신이 정한 선을 넘자 중종 본인이 앞장서서 조광조 및 그의 추종 세력을 숙청하고 귀양보내게 된다.

이렇게 막을 내린 조광조였지만 그 이후 조선은 성리학과 사림의 세상이 되었고 중종 또한 사림이 거의 없어지자 다시 강해지게 되었다.

이에 그렇다할 업적을 세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다음 왕 명종이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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