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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업적 및 평가 임진왜란과 경복궁 화재

SUN 2021. 12. 2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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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4대 국왕 선조 

-재위기간 : 1567년 ~ 1608년 (약 42년)

-즉위 당시 15세

-명종 > 선조 > 광해군 


조선 선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왕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인지도가 성군과는 거리가 먼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상은 그래도 어느정도 업적이 있습니다.

 

선조가 비열한 왕의 이미지를 굳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임진왜란이 터지고 난 후 백성들을 버리고 피신을 한 탓이 있는데요.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견이 갈립니다.

 

선조가 만약 피신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왜군에게 사로잡혔을 것이고 이로 인해 식민지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지만 왜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선조의 판단은 실리적인 면에서는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실리적인 입장 말고 한나라를 통괄하는 군주의 입장에서 자신의 성을 버리고 피신한 것은 왜군도 생각하지 못한 선택이었고 그로인해 백성들에 대한 왕의 이미지는 당연히 안좋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조선 제 14대 왕 선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서자 출신 선조, 생각외의 좋았던 능력 

왕이 정치를 펼치기 전, 같은 왕이어도 정통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왕권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였지만 선조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전 왕인 명종이 승하하고 뒤이어 순회세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서자 출신인 선조가 어부지리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도 잠시 인순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선조는 자신의 불안한 왕권임에도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통해 신하들을 바로 잡게 됩니다. 사실 임진왜란만 빼고 보면 선조는 생각보다 업적도 많으며 다른 왕들에 비해 뒤쳐지는 것이 없는 왕입니다. 

 

선조의 재위 기간은 다른 왕들에 비교해봤을 때도 그 기간이 상당한 만큼 자신의 출신에도 불구하고 신권을 똑바로 잡는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이를 반영하듯이 선조의 시기에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많이 배우던 정철과 더불어 이황, 이이같은 문인들도 있었고 이순신, 권율 같은 이름있는 무장들도 선조 때에 나타난 인물들입니다. 

선조의 업적

  • 본격적인 사림의 등용 ( 이때부터 사림이 실세가 되었다 ) 
  • 훈련도감 설치 및 비변사의 기능 확장 
  • 적재적소한 인재 등용

하지만 이런 업적들을 다 묻어버리는 선조의 과오또한 존재하는데요. 아무래도 임진왜란에 대한 방비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물론 통신사에 파견된 신하가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당했다는 점에서 군주로서의 역할은 다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선조의 재빠른 도망, 백성들에 의해 타는 경복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전국통일을 이룬 직후, 조선을 쳐들어오게 됩니다. 한반도의 역사 상 대규모의 왜군이 쳐들엉게 된 임진왜란, 그 당시 왜군은 우리에게 오랑캐와 비슷하듯 천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 당시 기준으로 천한 왜군에게 선조는 부랴부랴 평양을 기나 신의주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조가 만약에 경복궁에서 잡했으면 나라가 망했을거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요소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선조가 파천하게 된 이유를 면밀히 살펴보면 수도를 천도하여 왜군을 방어할 목적이 아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피신하려 했다는 선조실록에 나와있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국가를 버리고 명나라로 피신하려는 선조의 모습을 보면서 왜군보다 정부에 분노하게 되고 왜군이 당도하기 전에 경복궁은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타버립니다. 

 

여기서 선조는 도망가기 위해 한 대비책을 마련합니다. 바로 광해군에게 왕실의 종묘사직, 신주에 모든 권한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정식 세자로 책봉하면서 적자가 아니었던 광해군은 세자로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선조가 대피해 있을 때 광해군은 고향을 지키던 북인과 함께 왜군에 맞서 저항하게 되고 광해군의 힘을 입은 우리의 조선의 군대는 결국 임진왜란의 승기를 잡아가게 됩니다. 

선조, 책임감과 실리의 차이 

선조가 궁전을 버리고 피신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잘 한 선택이었습니다. 왜군의 문화 상 끝까지 자신의 성을 지키고 뚫린 경우 할복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당시 한양만 가면 전쟁이 끝날거라 예상했습니다.

 

따라서 한양을 목적으로 전쟁이 이뤄줬고 당연히 선조가 한양에서 죽기살기로 저항할 줄 알았던 일본군, 근데 막상 궁전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고 경복궁은 이미 타 있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그 때부터 우왕좌왕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조가 이런 피신 이후 대처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피신을 한 목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명나라까지 대피하려고 한 선조, 여기서 우리는 그가 전략적으로 피신을 한 것이 아닌 자신의 안위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선조는 조선의 국권을 명나라에게 반납하고서라도 명나라로 넘어가려 했고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의주 쪽에 남긴 했지만 역사에선 그 모습들이 다 기록되었습닌다. 

 

이렇듯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이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추대받자 그것까지 시기했던 선조, 백성들의 입장이나 후대의 평가는 그리 좋을 수 없을만한 왕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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