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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 이괄의 난 배경과 병자호란

SUN 2021. 12. 3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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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부터 병자호란까지.. 조선 16대 국왕 인조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

-청나라 광해군을 몰아낸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까지 

 

재위기간 : 1623년 ~ 1649년 (27년)

광해군 - 인조 - 효종

특징 : 반정으로 왕이 됨, 정통성 부족 


머저 후세에 대한 인조의 평가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광해군의 반정 이후 인조가 그렇다 할 업적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해군을 몰아낸 직후 청을 오랑캐로 평가하던 조선의 서인 세력들이 집권하자 청나라가 광해군을 몰아낸 것에 대해 반발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켜 국가가 쑥대밭이 된 점을 고려했을 때, 선조와 더불어 역대 무능한 왕의 순위에 든다.

 

그의 왕위 직후 반정 공신을 평가하던 도중 이괄의 의견 충돌이 있었고 조선 역사 상 가장 큰 내부 반란이 이괄의 난이 터지게 된다. 

 

집권 초기부터 터진 반란.. 이괄의 난 


반란의 계기

북방을 관리하던 이괄이 한양을 점거한 가장 큰 반란이었으며 이는 성을 점령하고 새로운 왕을 만들기 까지에 이른다. 역대급 반란임에도 이괄의 난은 현재 대중에게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괄은 인조반정 때 공신으로 북방을 수비하는 무장이다. 반란 당시 이괄은 부원수 위치에 있으며 1만 5천 여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이괄의 군대를 제외한 조선의 관군이 30,000여명)

 

그 과정에서 갑자기 이괄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게 되자 인조는 이괄을 신뢰하여 이괄 대신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여 국문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괄의 권한을 그대로 둔 채로 아들을 잡아오게 시켰고 이괄은 자신의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를 죽이게 된다. 

 

반란의 시작 

왕의 사신을 죽인 이괄은 당시 계획적인지, 충동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곧바로 반란을 시작한다.(왕의 사신을 죽였으니 잘해봐야 교수형이기에..) 반란의 시작 때는 그렇다 할 전투는 없었으며 산길을 통해 한양까지 진격하게 된다. 하지만 반란의 명분이 없었기에 이괄의 군인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이괄의 군대는 성 하나하나 쓰러트리기에 충분했고 고답로 관군을 기습해 승리하게 된다. 마타 전투에서는 장수 7명의 목을 베어 관군의 후발대에 보게 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정적을 제거하고 도망친 인조, 한양을 점거한 이괄

인조는 내통의 위험이 있다며 북인 계열 37명을 제거한다. 이에 민심은 병자호란 이전에도 이미 바닥이 난 상황. 이에 민심은 명분이 없는 이괄에게 돌아서게 되며 한양에 입성하게 된다. 

 

의관을 갖추고 영접하였으며 백성들도 길을 만들어 극진하게 이괄을 맞이하게 되면서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한다. 하지만 한양에 들어간 이상 지방에 있는 모든 관군들이 모이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만 되었을 뿐, 결국 관군들이 몰려들어와 싸움을 걸어오게 된다. 

 

당시 이괄의 군대가 수적으로나 사기적으로나 우세했음에도 관군들이 기적의 승리를 거두어서 결국 이괄은 부하들에게 목이 베어 죽게 된다. 

 

이같은 이괄의 난으로 인해 결말은 결국 인조가 왕으로 복귀하게 되었지만 북방의 군사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으며 이는 결국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발발 

인조 14년 이번에는 청의 침략이 발발하였다. 이전에 정묘호란이 인조 4년에 있으면서 10년 뒤인 다시 청나라가 쳐들어왔으며 이는 결국 조선의 패배가 되었으며 조선은 군사,경제적으로 속국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계기에는 청나라의 강력한 군사력에 다른 나라를 재패하려는 욕심이 있었겠지만 이전에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 정도로 보았다.

 

명나라 때만 해도 청나라는 그 때 후금이라는 칭호를 쓰며 별볼일 없는 북방의 오랑캐였을 뿐이었으나 갑자기 급성장하여 결국 명나라를 쓰러트리고 청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하지만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을 철저하게 무시하자 후금이 청나라로 바뀌고 나서 조선을 쳐들어오게 된다. 

"나라가 망할지라도 후금과 친선 못맺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조정에는 친명배금의 입장이 확고했으며 이는 정당과 상관없이 조선의 주류 입장이었다.

 

실리를 추구했던 최명길과 이귀는 참수에 처하라는 상소가 잇따를 정도로 입지가 매우 좁았으며 이는 결국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이 된다. 

 

계속 밀고오는 청나라 군대 속 남한산성에서의 항복

이전 이괄의 난으로 인해 조선의 군대는 그야말로 정비가 안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청타이지는 4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오게 된다.

 

당연히 조선은 쑥대밭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밀고 들어와 단 8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키게 된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기 전술을 하였으나 계속되는 겨울의 추위 떄문에 상황은 점점 급박해져 갔다. 

 

또한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을 당시 외부 상황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태 그 자체였는데 청나라 군이 둘러싸고 있자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고통이었을 것이다. 

 

진격해온 청나라 군대를 보자 이제야 상황을 직감한 조선의 정부 관리들, 나라가 망해도 청나라와의 화친이 안된다고 했던 의견이 주류였던 이전과는 달리 점점 최명길의 청나라와 화친하자는 의견이 점차 입지를 넓히게 된다. 

 

하지만 이제 화친도 안될 정도로 정세가 급박해져갔으며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되자는 조항을 받아들이면서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화친을 맺게 된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고 소현세자는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달리 시장도 활발히 개설되지 않았고 문화 면에서나 기존의 백성의 삶의 모습에서나 점점 피폐해져 갔다고 보면 된다. 

 

개인적인 입장이지만 훈구파를 몰아내고 사림이 등용하면서 조선은 이전의 경전만 찾을 뿐 실리적인 면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국가로 나아갔으며 양반들을 먹여살리고자 90% 이상의 백성이 그야말로 혹되게 일하며 살아야 했다.

 

그 당시 조선에 상인조차 거의 없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드라마로 각색된 것과 달리 조선의 상황이 얼마나 서양이나 청나라에 비교해서 뒤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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