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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독살설 과연 사실일까? 조선 최초 왕의 의문사

SUN 2022. 1. 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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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에 우호적이던 소현세자, 독살?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 그는 효종의 동복형이자 원래 효종 이전에 왕이 될 세자였지만 의문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효종이 왕이 되게 되었다. 

 

효종과 소현세자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효종은 직접 북벌정벌이라는 야심한 계획을 내세울 만큼 청나라에 뼛속깊이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현세자와 효종은 같이 청나라에 볼모로 갔지만 그에 반해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매우 우호적이고 발전한 청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의견차이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과 우호적인 관게를 맺을 것을 우려한 반대파가 소현세자를 암살했다는 것이 주된 독살의 인과성이다.

청나라에 끌려가서 나빠진 인조와의 관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갔을 때 자신이 끌려온 볼모 취급을받는 것이 아닌 손님이라는 입장으로 그들에게 대등한 위치를 요구하며 청나라에서 우대를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이용해 계속해서 인조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안들으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세자를 잊었냐고 말하며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 세자를 왕으로 세웠으면 나았을 것 같다" 라는 말 등을 하면서 인조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자신이 머리를 조아린 청나라에 우호적으로 다가서는 소현세자의 입장과 자신의 추락한 왕위를 고려할 때, 점점 파벌이 나뉘게 되었고 결국 인조와 소현세자는 정적처럼 서로를 돌아서게 된다. 

 

야사중에는 소현세자를 비방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무척 유명한 일례 중 하나로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받은 벼루를 자랑하다 인조가 벼루를 소현세자에게 던져서 죽었다는 썰이 있다..

 

이 야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봉림대군은 청나라를 떠날 때 소원으로 포로들의 송환을 요구했는데 소현세자는 벼루와 붓을 요구해 화나서 인조가 던졌다는 명백한 야사일 뿐이다. 

세자의 죽음 속 이야기

조선의 독살 사건 중 공통점은 구멍에서 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말이다. 소현세자의 실록의 기록 또한 세자의 시신에는 이목구비 일곱구멍에서 피가 흘렀다고 나와있다. 

 

따라서 이 내용은 아직도 소현세자읟 독살설에 힘을 실어주는 내용이다. 하지만 장례를 빨리 치른 것도 의심 행동으로 보지만 이것은 해당 독살설에다 끼워 맞춘 경향이 없지않아 있기에 그렇다할 증거는 되지 못한다. 또한 이 내용은 거짓 주장에 가깝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신문물에 눈을 뜬 사람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청나라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상인을 키우고 실리를 추구하는 것은 훗날 조선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인조는 청나라라는 그 당시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소현세자는 단지 미워보였고 그런 일화들 때문에 이렇게 독살설이 퍼진 것 같다.

 

현재로서 소현세자가 독살이 되었다는 강력한 증거는 없다. 물론 예전의 역사만을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기에 시기와 상황 상 세자의 독살이 근거가 없지만은 없다고 판단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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